이 글은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저는 영사가 되기 전 검찰 및 해양경찰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당시 저는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항상 궁금했었기에 중국 북반부 최대어항인 산둥성 룽청시에 있는 석도어항에 자주 나갔다.수감된 우리 국민들의 영사면회를 하려고 웨이하이, 옌타이 등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주변의 어항과 수산시장을 방문하였다. 중국어선이 우리 해역에 넘어와 불법조업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한국 해양경찰의 공권력에 도전하는 사례가 빈발하였기에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영사로 재직하면서 병이 나거나 부상을 당한 우리 국민의 응급치료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시킬 때면 의외로 한국에 연고가 없는 분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발 벗고 도와준 단체가 바로 ‘재외한인구조단’이었다.이러한 단체가 있고 고마운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오늘은 재외한인구조단이 일본 나고야에서 진행한 구조 활동에 대해 말씀드리겠다.구조단은 일본 나고야 총영사관으로부터 긴급하게 구조해야 하는 분이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다.건설현장 일용직 일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국외 거주 재외한인은 750만 명으로 5000만 전체 인구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한국인이 해외에 살고 있다.이들 중 약 10만 명은 각 해외에서 가난과 무지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다.이런 현실 속에서 재외한인구조단은 자의든 타의든 부득이하게 먼 이국땅으로 건너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외한인들을 구조하고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대한민국 대사관, 각국에 나가 있는 재외공관, 각국의 한인회 등 재외한인과 관련된 정부 기관 및 유관 단체들과 협력을 통해 어려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김종유 전 웨이하이 한인회장님과 영사협력원 최현철 님의 노고에 대해서는 이 자리를 빌어 특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웨이하이시는 총영사관과의 거리가 약 300km가량 되었기에 긴급한 사건이 발생하면 담당 영사가 도착하기 전에 초동조치가 필요했다.납치, 감금 신고가 접수되면 공안 신고 후 현장에 가야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현장 상황을 파악하여 담당 영사가 조치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하는 등 매우 고단한 일상이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4년간 저의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칭다오 백두산조선족양로원'은 2006년 5월 손옥남 설립자가 칭다오시 지머구에 인민폐 30만 위안을 투자해 '복운룡'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시작했다.2대 원장이 된 김설화 원장은 조선족 3세이다.손옥남 설립자는 의사인 딸이 양로원에 계신 동포 어르신들을 잘 치료해주기를 기대했으며 졸업하자마자 양로원장 자리를 넘겨주었다.백두산 양로원은 한국의 명절인 추석, 단오 등의 날에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고 김치, 송편 등의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고 있다.이곳 어르신들은 고향의 풍경이 담긴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칭다오 백두산조선족양로원'은 2006년 5월 손옥남 설립자가 칭다오시 지머구에 인민폐 30만 위안을 투자해 '복운룡'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시작했다.4명의 직원이 2명의 노인을 모시고 첫 스타트를 시작했지만, 현재 160여 명의 노인과 20여 명의 직원으로 발전했으며 그중 5명의 대학 졸업생과 3명의 전문가 수준의 의료진이 있다.2010년 5월에는 200만 위안을 재투자하여 지금의 서원장에 2천 제곱미터 규모의 현대화 시스템을 갖춘 백두산 양로원으로 확장 이전했다.손 설립자
제가 칭다오 영사로 부임한 2015년, 제10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은 이수존 총영사였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멘토가 되는 사람이 있는데 이수존 총영사님이 내게는 바로 그런 분이셨다. 2018년 1월 2일 이수존 총영사는 이임 인사를 통해 “재임 기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영사관 건물 이전이었고,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은 웨이하이 유치원 차량 화재 참사 건이었다”라고 말했다.그리고 “현재 한국과 산둥성 간 연간 무역액이 250억 위안에 달하고, 한국의 대산둥 투자액은 360억 위안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재산둥 20여만 명 조선족들의
제가 칭다오 영사로 부임한 2015년, 제10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은 이수존 총영사였다.살아가면서 누구나 멘토가 되는 사람이 있는데 이수존 총영사님이 제게는 바로 그런 분이셨다. 저는 그분의 철학을 믿고 따랐고 존경했다.이수존 총영사는 2015년 4월 칭다오 한국총영사관 총영사로 부임한 이래 산둥성 한겨레사회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지역 정부와의 친선교류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그리고 중국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중국어 실력, 중국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 중국의 전략정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우리 국민이 귀국하거나 가해자가 수사기관에 구류되는 등 종국적으로 신변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신변위협에 따른 총영사관의 지원을 호소하는 우리 국민과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중국 공안 사이에서 사건 사고를 전담하는 영사에게는 지속적인 업무 부담이 크다고 할 수 있다.단순 폭행 사건의 경우에도, 멱살이나 삿대질만으로도 즉시 형사입건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폭행이 있다 하더라도 정도가 약할 경우에는 불입건 또는 치안관리법(우리의 경우 범죄에 해당)에 의해 처벌하는 경우가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산둥성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해 있기에 우리 국민과 관련된 사건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편이다.주칭다오 대한민국총영사관은 ‘365/24 시스템’이란 슬로건 아래 사건접수 초기부터 현장 출동 지원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365/24 시스템’이란 365일 24시간 출동태세를 유지한다는 의미로 실제 현장을 직접 가봐야 답이 나온다는 기본 원칙을 표현한 것이다. 총영사관 직원들은 이 슬로건을 구체적으로 사망(병원 내 사망 제외), 납치 감금, 기업분규 등 사건에 적용하였다.다
제가 중국 칭다오 총영사관 영사로 근무하면서 접한 신종 범죄 유형들에 대해 분석하고 정리해봤다.사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재외국민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기술한다.■ 한국인 상대 인터넷 구인광고 사기 범죄한국인 신 모씨 외 2명은 하오산둥(好山東) 취업사이트 구인광고에 게시된 ‘누구나 할 수 있는 물류 운송’이라는 글을 보고 구직을 위해 게시된 연락처로 담당자에게 연락했다.전화를 받은 박 모씨(한국인 사칭 중국인 추정)는 “신발을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운송하는 일이며, 1번 운송에 3000위안을
제가 중국 칭다오 총영사관 영사로 근무하면서 가장 우선인 것은 재외국민보호였다.영사업무 지침 제3조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일반원칙-재외공관은 헌법상 규정된 국가의 기본의무인 재외국민 보호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재외공관이 보호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의 여부가 불명확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가급적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재외국민 보호업무를 수행하여야 한다.실제 4년간 중국 칭다오 현장에서 근무해보니 영사조력 범위를 벗어난 무리한 요구(환전, 숙식비제공, 택시비대납, 통역 서비스, 신변경호,
제가 4년간 근무했던 중국 칭다오 총영사관은 사건 사고 발생 건수가 전 세계 공관 중에서 3위에 해당할 정도로 많은 곳이었다.휴일은 커녕 명절도 없이 밤이나 낮이나 전화가 오면 사건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목숨을 담보로 시간을 다투는 사건들도 비일비재했고, 그런 사건이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낯선 나라에서 그 수많은 사건을 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종교의 힘도 있었다.저는 가톨릭 신자로 하느님께서 나라는 연약한 존재를 통해 그런 힘든 일을 해낼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현장으로 달려나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