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

저는 영사가 되기 전 검찰 및 해양경찰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 저는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항상 궁금했었기에 중국 북반부 최대어항인 산둥성 룽청시에 있는 석도어항에 자주 나갔다.

수감된 우리 국민들의 영사면회를 하려고 웨이하이, 옌타이 등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주변의 어항과 수산시장을 방문하였다. 

중국어선이 우리 해역에 넘어와 불법조업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한국 해양경찰의 공권력에 도전하는 사례가 빈발하였기에 중국어선 불법어로 행위의 원인분석과 재발 방지를 위하고 선제적 예방조치 방안을 강구하기에는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금어기 기간에도 중국 어시장에서는 양식되지 않는 어종이 냉동상태가 아닌 선어 상태로 거래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저는 어시장을 돌면서 각종 생선의 아가미 내부를 살피면서 신선도를 따져가며 가격을 흥정하는 수준도 꽤 능숙해졌다. 그러니 지방 출장을 다녀올 때면 온몸에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였다. 

산둥성 출항 선박이 우리 해역에서 조업하는 불법어선 중 가장 큰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나, 다른 지역 선단과 비교해 집단적이고 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나포를 모면한 경우가 빈번하여 나포 선박 통계가 실제보다 낮았음에도 제가 처음 부임하였을 당시만 하더라도 산둥성 출항 어선의 나포 건수는 전체 중국어선 나포 건수의 50%를 상회하고 있었다. 

매년 봄철 성어기(4월~6월)만 되면 민감수역인 우리 서해 NLL 주변 해역에서의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이 끊이지 않았다.

매년 2회 개최되는 ‘한중 어업문제 협력회의’에 빠짐없이 대표단으로 참석할 때마다 중국 대표단은 ‘중국 중앙정부는 불법조업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으며, 중국 어민들에게 ‘문명적 어업행위’를 지속해서 계도·감독하고 있고, 지방정부도 중앙 정부의 지시에 따라 지속적인 단속을 진행하고 있다‘는 취지로 대응하였다.

실제 제가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따르더라도 중앙정부와 성정부에서 지속해서 불법조업 근절 관련 공문이 지방정부로 하달되고 있었고, 해당 지시에 따라 현장에서 관리감독을 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1992년 8월 이루어진 한중수교를 계기로 양국은 어업 문제의 타결을 위한 협의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1993년 12월부터 어업협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한중간 어업 문제에 관한 한, 배타적 경제수역 제도의 조기 도입 보다는 현행의 공해자유 원칙에 입각한 어업질서를 선호하여, 양국 간의 배타적 경제수역이 확정될 때까지 12해리 영해 이외의 수역을 모두 현행 자유어로질서를 유지하자는 주장을 하여 협상타결에 처음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중국은 지속해서 자유어로질서를 주장하며 공동어로 구역을 넓히려는 시도를 한 반면, 한국 측은 이 공동어로구역을 최소화하고 연안국이 배타적 관리를 하는 수역을 넓히는 것을 지향해왔다. 이렇듯 뚜렷한 견해차와 중국의 소극적 태도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양국은 1998년 11월에 협상을 종결하고 2001년 6월 마침내 「한중어업협정」을 발효시켰다.

중국 정부가 중국어민을 대상으로 한국해역에서의 불법조업 행위를 일종의 ‘비문명적 행동’으로 간주하고 실질적인 근절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고는 하지만 중국어민들에 대한 전면적인 의식 개조가 선행되지 않으면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산물 유통센터나 어시장에서 만났던 중국 어민들의 내심을 살펴보면 한중어업협정 체결 이전에는 한국의 해역에서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마치 앞마당과 같이 편하게 물고기를 잡았던 터전이라는 의식이 매우 강했다. 

한중어업협정 체결 이전에 한국수역에서 어로행위를 하였던 습관과 거기서 얻어왔던 이익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면서 노골적으로 한중어업협정을 체결한 중국정부에 불만을 표출하는 어민도 있었다. 그러한 뿌리 깊은 인식에 사로잡힌 중국어민들은 우리 해경의 단속으로 설령 어선이 나포되더라도 “계” 형식의 상호부조를 통해 분담금을 조달하고, 어선을 되찾아 어획 활동을 통해 경제적 손실을 메울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 해경의 단속이나 중국 중앙정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은행에서 대출받아 선박을 구입하고, 7~8일 동안 10명 내외의 선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어선을 운용하는 선주의 입장에서는 일정량 이상의 어획량을 확보하지 않으면 생존권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계속해서 불법조업을 감행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저는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중국어선 불법조업의 근절을 위해서는 중국어민들의 의식 개조와 중국정부 차원에서 어민계도가 실효적이고 꾸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중국 당국자와 관련 문제를 협상하면서 그러한 문제점을 줄기차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중국정부도 중국어선 불법조업이 근절되지 않는 원인을 분석하고, 조업량 감소로 인한 중국 어민의 수입 감소를 보전하는 방안을 고심하였다. 룽청시는 자체적으로 정책을 수립하여 어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 및 수입원 창출을 위해 수산물가공센터 건설, 양식어업 확대 유도 등을 위한 무이자대출 비중을 높이는 조처를 하였다. 선주들도 자체적으로 주요 수산물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수산물 유통센터를 개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그간 수입할 수 없었던 선어(냉동상태로 보관되는 것이 아닌 얼음으로 신선도를 유지하는 수산물)를 수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포해경 관할수역에서의 중국어선 선장 총기 사망사건은 중국 어민 사이에 한국 해경의 공권력 집행이 엄격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한국 해경의 법집행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중국 어민의 말을 직접 청취해보니 중국 어민들 사이에 우리 해경의 공권력 집행은 실효성을 거두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중국 해경국은 우리 해경의 단속활동과 관련하여 무기사용 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였다. 

점차 중국 정부는 그간 중국어선의 불법조업이 중국 어민들의 생계보장 차원에서 불가피하고, 행정력 미비로 어선과 어민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는 입장에서 다소 벗어나, 더는 불법어업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모든 어선에 위치추적시스템 가동을 의무화하여 관련 시스템을 정비하고, 어민계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에 변화를 주었다. 

또한, 산둥성 룽청시는 중국어선에 대한 법집행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룽청시 해양어업집법대대’를 정식으로 출범하고, 산둥성정부는 ‘산둥성 어업선박관리방법’을 발표하는 등 관할수역 내 어업선박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어업선박이 해외 작업 시 국제공약 및 타국과의 어업협정조약을 지킬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산둥성 웨이하이시 해양어업국과 웨이하이시 공안국은 법에 의해 불법 월경 조업행위에 대해 엄격하게 처리할 것을 표명하였다.

밀월관계로 발전해가던 한중 양국 간에는 사드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문제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저는 석도어항이나 수산시장을 돌 때마다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중국 당국자를 만날 때에도 현장의 느낌을 그대로 전하면서 정책 변화를 이끌었고, ‘한중 어업문제 협력회의’ 때 중국 측에 강력한 개선 노력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부임한 이래 중국어선 불법조업이 감소추세에 있다는 통계를 접하고 보람을 느꼈다.

 

저작권자 © 한국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