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나 종군 위안부 등 첨예한 과거사 현안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일본의 반성과 사과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일본과의 협력 필요성만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런 대통령 3·1절 기념사는 없었다.

역대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는 “역사 직시”나 “과오 반성”, “진실 인정” 등 과거사 관련 언급이 항상 포함됐다.

하다못해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일본을 향해 과거사 관련 언급을 했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이명박, 89주년 기념사),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박근혜, 94주년 기념사)

일본의 식민지 침략과 지배에 대해 면죄부를 안겨주며 일본을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바꾼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3.1절을 '친일절'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 쪽 반응도 곧바로 나타났다. 일본의 언론매체들은 일제히 현안인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점과 ‘파트너’라고 한 발언에 주목했다.

일본 정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환영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1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를 건전한 형태로 되돌려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한국 정부와 계속 긴밀하게 의사소통을 해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정부는 지난 6일 일본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해법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국내 기업 출연으로 재원을 마련해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정작 가해 기업은 사과도, 배상도, 참여도 없다. ‘강제동원 문제에는 1엔도 낼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굴욕적인 해법이다.

윤 정부가 위와 같이 강제동원 피해 배상을 강행한다면 단지 외교 참사에서 그치지 않고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될 것이다.

행정부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은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며 미쓰비시 등 전범 기업이 피해자 개인에게 “불법 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비추어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라는 헌법 해석을 전제로 하였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해법은 배상금을 내는 주체가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피고 기업이 아니라 국내 기업들이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불법이라는 우리 헌법 정신을 정부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며, 불법적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구제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의 근본 취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헌법 제69조에 따라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불법이라는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의 헌법 해석을 부정하는 것은 심각한 ‘헌법 준수 의무’ 위반이다.

분명한 것은 윤 정부의 해법으로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국에서 대법원 판결을 받은 피해자는 현재까지 4건 15명에 불과하다. 이미 법원에 계류 중인 소송만 66건에 1124명이다. 대법원의 2018년 판례에 따라 승소 가능한 소송들이다.

한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강제동원 피해자는 21만8639명이다. 윤석열 정부가 일방적으로 해결을 선언해 봤자 소용없으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그렇게 끝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의미다.

과거 정권 때의 전례를 살펴보더라도 윤석열 정부의 해법은 실패가 예고돼 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한일 정부가 합의한 위안부 문제 해법이었던 이른바 ‘12·28 합의’도 결국 실패했다.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해법 역시 박근혜 정부의 12·28 합의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밀실 추진 협상과 굴욕적인 합의의 결말, 정부의 일방적인 합의 발표와 피해 당사자들의 거센 반발, 심각한 민심 이반과 반정부 여론의 확산 등 정치적 후폭풍이 이어질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막후 압력이다.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미국 정부가 환영하고 나섰다. 네드 프라이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1일 정례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공유하는 가치를 바탕으로 일본과 더 협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에 대한 비전을 분명히 했다”고 반색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한국, 일본과의 3자 협력이 21세기 도전 과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며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 박수를 보낸다”고 환영했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지난 1월 7일 워싱턴 외신기자클럽 언론 브리핑에서도 “바이든 행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한국과 일본 동맹을 하나로 묶은 삼각체제를 활성화하려 노력해 왔다”며 한미일 삼각체제를 강조한 바 있다.

미국이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한일관계 ‘정상화’의 미명 아래 한국 정부를 압박해 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미일 삼각체제 강화의 현안 중 하나가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이며, 미국은 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압박해 왔다.

한미일 삼각체제, 실상은 한국이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편입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윤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파트너’로 지칭한 것은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한국을 편입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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