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에서 서호천 그리고 융, 건릉까지

조선 정조대왕이 만들었다는 축만제, 아름다운 수원 서호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조선 정조대왕이 만들었다는 축만제, 아름다운 수원 서호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길이란 한 사람이 지나가고 또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면 길이 된다. 아름답던 그 길도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자연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정겨운 옛 길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새롭게 조성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아름답게 조성된 길이라도 걷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차이가 있다.

서호저수지 내 철새들의 낙원 인공섬(사진=김호선기자)
서호저수지 내 철새들의 낙원 인공섬(사진=김호선기자)

수원(화성)에는 “정조대왕 효(孝)의 길”이 있다. 수원 서호(西湖)공원 – 중복들길 - 배양교 - 융(隆), 건릉(健陵, 12km)까지 걷는 길이다. 효의 길은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역사는 정조대왕을 ‘효심과 애민정신 그리고 개혁’을 이야기한다. 서호는 여기산(104m) 아래에 있으며 접근성이 편리하다. 국철을 이용하여 화서역 5번 출구로 나가면 서호공원이다. 효의 길은 서호공원둘레길을 돌고 돌아 항미정에서 서호천을 따라 융, 건릉으로 향하는 길이다. 서호천에는 각 종 철새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으며 산책로에는 운동기구들이 즐비하다. 능수버들이 흐느적거리는 운치있는 역사길이다.

축만제 건설 당시 심웠다는 서호 제방 소나무(사진=김호선기자)
축만제 건설 당시 심웠다는 서호 제방 소나무(사진=김호선기자)

조선시대 길 삼남길이 복원되어 있다. 이 길은 한양 도성을 출발하여 수원 천안 익산 - 광주를 거쳐 해남까지 이어지는 1,000리 길이다. 삼남길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길이다. 각 고을마다 지니고 있는 역사를 연결하는 길이다. 삼남길은 보부상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의 길이다. 서호천변은 삼남길과 수원팔색길, 모수길, 수원둘레길 등이 겹쳐 있는 구간이다. 서호공원과 서호천은 걷기 좋은 환경으로 사시사철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그림 같은 풍경이다.

서호 제방에 남아 있는 축만제 비(사진=김호선기자)
서호 제방에 남아 있는 축만제 비(사진=김호선기자)

여기산 아래 서호를 축만제(祝萬堤)라 한다. 정조23년(1799) 천년만년 동안 만석(萬石)을 생산할 목적으로 축만제(서호,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를 축성했다. 축만제 물로 농사를 경작하여 남은 수익금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한 저수지라 한다. 서호는 작은 저수지이지만 당시 최고의 저수지로 새들의 보금자리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도심지 호수공원이다. 서호에는 민물가마우지, 큰기러기, 뿔논병아리. 쇠백로, 쇠기러기, 물닭, 흰뺨검둥오리 등이 서식한다. 서호에 있는 인공섬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철새들의 낙원이다.

서호 아래 조성된 시험재배 단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서호 아래 조성된 시험재배 단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서호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 설립으로 이어졌다. 2016년 축만제(서호)의 가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국제관개배수위원회의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축만제는 정조가 내탕금 3만냥으로 축성한 저수지이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이다. 서호 밑에는 농촌진흥청 시험답이 있다. 서호는 봄이 되면 아름다운 벚꽃들이 향연을 펼쳐지는 수원의 명소다. 수양버들. 목련, 살구꽃 개나리 등이 서호와 서호천에 만개한다. 서호천변에는 고딕 양식의 교회 건물도 이색적이다.

조선 순조 때 건축하였다는 서호의 항미정(사진=김호선기자)
조선 순조 때 건축하였다는 서호의 항미정(사진=김호선기자)

정조는 축만제를 축성한 이후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했다. 가을에 벼가 황금색을 띄며 익어갈 때 축만제 들녘에는 새들이 벼를 쪼아 먹을까 바 하얀 그물을 치는데 그 풍경이 장관이라 한다. 상상이 된다. 호수 제방에 있는 소나무들은 축만제가 축조될 때 심었던 고목이다. 제언절목(提堰節木) 의미로 축만제 제방 당시 계획을 세워 축조한 것으로 저수지 면적, 유지관리 방법, 인력동원 방법, 제언의 통계작성 및 보고 등을 규정하였다 한다.

서호에서 시작되는 서호천 길(사진=김호선기자)
서호에서 시작되는 서호천 길(사진=김호선기자)

항미정(杭眉亭, 경기도 문화재자료제198호)은 1831년(순종31) 축만제 변에 건립한 정자다. 중국 항주에도 서호가 있는데 항미정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 구절의 미목(눈썹)같다는 의미에서 따운 정자 이름이라 한다. 순종황제가 수원을 농행農行하였을 때 융, 건릉 참배 한 후 서호 항미정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항미정은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로 독립운동 결사체를 조직하고자 수원출신 학생들이 준비모임을 하던 곳이라 한다. 항미정의 낙조는 수원 팔경 중 제6경으로 환상적이라 한다.

서호천 변 아름다운 벚꽃나무(사진=김호선기자)
서호천 변 아름다운 벚꽃나무(사진=김호선기자)

수원사람들은 발가벗고 삼십리를 뛴다는 말이 있다. 서호와 병점의 두 지역간 거리가 삼십리다. 병점은 순수한 우리말로 떡전거리라 한다. 옛날 떡전거리에 효심이 지극한 한 선비가 있었다. 어느날 청년은 친구 따라 축만제 부근에 있는 행화촌에서 아리따운 기생의 자태에 술을 마시고 잠이 들고 말았다. 그날이 선친 제삿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청년은 다급한 마음의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집에 도착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다. 이 설화는 바로 수원사람들의 효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수원문화원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효의 길과 삼남길, 수원둘레길 등을 안내하고 있는 길잡이 리본(사진=김호선기자)
효의 길과 삼남길, 수원둘레길 등을 안내하고 있는 길잡이 리본(사진=김호선기자)

수호천에는 협궤열차 '수인선' 철교가 보전되어 있다. 수인선은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철로이다. 1937년 부설된 옛 수인선은 수원과 인천을 오고 갔으며 추억을 싣고 달렸던 철로이다. 수인선은 서해바다에서 생산된 소금을 실어 나르고 내륙에서 생산된 각 종 곡식을 수인선을 통해 반출하였다.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 열차는 운행이 중단된 철로이다.

서호천 주변 공장지대 사이의 넓은 들녁과 철새(사진=김호선기자)
서호천 주변 공장지대 사이의 넓은 들녁과 철새(사진=김호선기자)

서호천을 따라 걷다가 옛 수인선철교를 지나면 “중복들”이라는 넓은 들녘이 나온다. 이 들녘은 권선구 고색동의 속한 들녁으로 수원비행장 건너편에 있는 넓은 들이다. 서호천 물은 풍부하여 농사를 경작하는데 매우 좋은 조건이다. 중복들은 벌말, 들말, 평리라고도 불렀다 한다. 이 마을에는 살아있는 무형문화재 ‘고색민속줄다리기(수원향토유적 제9호)’가 있다. 화성축성 이후 양반, 평민, 농민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였다. 매년 정월대보름날 “코잡이놀이” 행사가 열리고 있다. 배양교는 수원과 화성의 경계지점이다.

추억의 협궤열차 수인선 철교(사진=김호선기자)
추억의 협궤열차 수인선 철교(사진=김호선기자)

황구지천(黃口池川)의 들판을 지나면 화성 융, 건릉(사적 206호)의 도착한다. 융릉은 추존 장조와 현경왕후의 합장 능이다. 장조(1735~1762)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두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49년(영조25) 15세에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와의 불화로 병을 얻게 되었다. 1762년(영조 38) 노론과의 정치적 대립으로 왕세자 신분이 폐위되고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다. 영조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화성의 있는 융, 건릉 중 장조의 융릉(사진=김호선기자)
화성의 있는 융, 건릉 중 장조의 융릉(사진=김호선기자)

조선 제22대왕 정조(재위기간 1776~1800)가 왕위에 오른 후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칭호하고 1899년(광무3)장종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다시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라 부른 비운의 사도세자이다. 현경황후 홍씨(1735~1815)는 1744년(영조20)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에 봉해졌고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혜경궁이 되었다. 남편 죽음에 대한 회고록 '한증록'을 작성했다. 1789년(정조 13)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재의 자리에 조성하고 1825년 현경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한 왕릉이다.

융, 건릉 중 정조의 건릉(사진=김호선기자)
융, 건릉 중 정조의 건릉(사진=김호선기자)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능이다. 정조(1752~1800)는 황제로 추존된 장조와 현경황후 홍씨의 둘째 아들이다. 1759년(영조 35)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며 영조(83세)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의 명예를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파와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수원성을 건축하는 등 업적은 남겼다. 효의황후 김씨(1753~1821)는 1762년 (영조38)왕세빈으로 책봉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으며 정조와 후궁 소생인 왕세자(순조)를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올렸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융릉 동쪽 언덕에 건릉을 조성하였다. 1821년(순조21)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능이다.

융, 건릉의 산책로 아름드리 송림(사진=김호선기자)
융, 건릉의 산책로 아름드리 송림(사진=김호선기자)

융, 건릉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신 융릉과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이다. 정조는 양주의 있던 아버지 묘를 이곳으로 모시고 현릉원이라 했다. 고종 때 추존하여 융릉으로 했다. 정조가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하여 부자를 한 구역에 모신 릉이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넋을 위로하였던 정조의 효심을 알 수 있다. 주변에는 원찰인 용주사가 있다.

융, 건릉 재실 앞 천연기념물 일명 조선선비나무 개비자나무(사진=김호선기자)
융, 건릉 재실 앞 천연기념물 일명 조선선비나무 개비자나무(사진=김호선기자)

융, 건릉 산책로를 따라 걷는 시간은 2시간이면 충분하다. 아름다운 연봉이 두 임금의 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융, 건릉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전나무 등이 많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직접 지켜 보았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즉위식에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은 노론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의 나라라고 말했다 한다.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였던 왕이다.

화성의 융, 건릉 안내도(사진=김호선기자)
화성의 융, 건릉 안내도(사진=김호선기자)

서호를 들머리로 삼남길을 따라 효의 길을 걷는 4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선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시간은 멍 때리는 시간이다. 정조가 즉위 동대문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를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른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정조는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화산 자락 마을 집집마다 재를 모아 뿌리게 하여 송충이 구제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정조는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장조(사도세자)의 옆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다. 사부곡의 현장 융, 건릉은 '효심(孝心)' 의 대한 지극정성을 되새기는 길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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