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와 나무가 많아 새남터라 부르는  4대 박해 동안 순교를 당한 새남터성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억새와 나무가 많아 새남터라 부르는 4대 박해 동안 순교를 당한 새남터성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역사는 흐르고 ‘용산역’ 주변도 변했다. 용산역 일대가 천지개벽했다. 용산역 역광장으로 나온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09년 용산 참사 이후 처음으로 용산역광장에 내린 것이다. 역 광장은 두 눈을 의심하게 한다. 세상이 확 바뀌어 넋을 잃게 한다. 잠시 빌딩 숲을 쳐다보는데 상전벽해란 단어가 떠오른다. 용산역 광장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 “새남터성지”를 향해 걷는다. 새남터로 향하는 이면도로는 옛날 이면도로는 뒷골목으로 옛 모습 그대로이다.  

새남터순교성전 앞에 서있는 '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새남터순교성전 앞에 서있는 '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청소년시절 새남터 나들목(한강공원) 부근에 지인이 계셔서 수차례 다녔지만 새남터성지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촌동 마을 모습은 옛 마을 모습 그대로의 풍경이다. 새남터성지 입구는 철로 건널목이 있다. 육교로 오르니 한옥 형태의 새남터성지가 보인다. 말로만 들어 왔던 새남터성지를 보는 순간 숙연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묵례를 올린 후 성지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이여! 십자가의 길에서 저희와 함께 항상 하소서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라는 글 앞에 한동안 발걸음을 멈춘다.

새남터순교성지 앞에 재현된 순교 당시의 형장과 유리속의 모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새남터순교성지 앞에 재현된 순교 당시의 형장과 유리속의 모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한국천주교회는 230여 년의 역사로 100여 년을 박해의 시간을 겪었다고 한다.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 앞에 까만 머릿돌(1984.5.6)이 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세운 머릿돌이다. 새남터는 일명 노들, 또는 사남기라고 불렸던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삶은 순교요. 순교는 사랑이다. 성지 앞에 조성된 순교 당시의 새남터 모래와 순교의 현장 모습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순교자들의 모후님 상과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동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춘다. 비록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슴이 저민다.

한강을 가로질러 웅장하게 서있는 여의도와 용산을 연결하는 원효대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한강을 가로질러 웅장하게 서있는 여의도와 용산을 연결하는 원효대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새남터순교성지는 용산 한강변에 있다.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이자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벌하는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신부를 시작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이다. 천주교 4대 박해(신유, 기해, 병오, 병인)를 거치면서 성직자 11인과 평신도 지도자 3인이 순교한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가 바로 이곳 새남터라 한다.

한강 둔치를 걷다 보면 원효대교 부근에 있는 등대 모습의 수위관측소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한강 둔치를 걷다 보면 원효대교 부근에 있는 등대 모습의 수위관측소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기해박해(1839) 때에는 앵베르부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 등 세 성직자가 순교하였다. 병오박해(1846)때는 김대건신부 외에 현석문, 병인박해(1866)때는 베르뇌주교와 브르트니에르신부, 볼리외신부, 도리신부, 푸르티에신부, 트티니콜라신부 등 5인의 신부와 평신도인 정의배마르코, 우세영알렉시오 등 두 사람의 평신도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중 9인의 유해가 새남터 기념관에 안치되어있다고 한다. 새남터성당은 1950년 서울대교구에서 순교기념지로 지정했다. 198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지하 1층 지상 3층의 기와 건물과 목조 3층탑 형식의 종탑을 준공하여 9월 1일 축성식을 했다.

원효대교 - 양화대교까지 사이에 있는 5개 나루터 중 하나인 토정나루터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원효대교 - 양화대교까지 사이에 있는 5개 나루터 중 하나인 토정나루터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서울 명동성당을 출발해 새남터와 절두산성지를 지나 삼성산성지까지 이어지는 천주교서울순례길(2018년)을 조성되어 있다. 이 순례길은 로마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순례지라고 한다. 그중에 청년 김대건신부 ‘치명순례길’이 있다. 이 순례길은 1846년 9월 16일 김대건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이동로를 말한다. 옛 우도포청-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새남터성지까지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서울 도심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서울 도심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새남터는 억새와 나무를 의미하는 새나무터의 준말이라 한다. 조선교구 설립 150주년이 되는 1981년 9월 3일에 순교지 새남터기념성당을 설립했다. 새남터는 목숨을 바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증거한 거룩한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고 기리는 은혜로운 주요성지라고 한다.

한강 둔치에는 옛 번창하였던 마포를 재현시켜 놓은 공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한강 둔치에는 옛 번창하였던 마포를 재현시켜 놓은 공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무거운 마음으로 새남터성지에서 절두산 순교성지(5.3km)까지 걷기 위해 한강변을 따라 걷는다. 한강 강북도로를 넘을 수 있도록 조성된 다리를 건너 이촌한강공원으로 간다. 하늘은 청명한데 강바람이 차갑다. 왼쪽으로 한강철교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강변북로로 이어진다. 공원에는 자전거길과 보행로 길이 조성되어 원효대교를 보면서 편안하게 걷는다. 많은 시민과 자전거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면서 새봄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한강에 있는 대교 31개 중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보행로가 있는 대교는 23개라 한다. 걸어볼 생각이다.

서강대교 부근의 구 당인리발전소 서울화력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서강대교 부근의 구 당인리발전소 서울화력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원효대교와 마포대교 사이 한강 둔치 공원에는 각 종목의 체육공원이 있다. 이 한강공원길을 걷다 보니 등대 같은 시설물이 서있다. ‘구 용산수위관측소(서울시기념물 제 18호)’에 도착했다. 이 관측소는 강변북로 담벼락 밑에 원통 모양의 시설물이다. 1924년 건립되어 50여 년 동안 한강수 위를 측정했다고 한다. 한강에서는 처음이고 전국에서는 9번째 건립된 자기관측소라고 한다. 1977년에 폐쇄되고 2002년 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양화대교 부근 둔치에서 바라본 절두산과 성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양화대교 부근 둔치에서 바라본 절두산과 성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한강공원에는 역사적인 지명이 많다. 추억을 새롭게 한다. 마포대교 못 미쳐 대중가요로 알려진 ‘마포종점나들목’이 있다. 나들목 입구에는 새우젓과 소금장수의 황부자 이야기가 있다. 예전 마포나루에는 소금창고 일꾼 황득업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매우 구두쇠였으나 새우젓 장사와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어 남몰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의인이었다 한다. 황부자는 전 재산을 들여 홍수를 막는 둑을 쌓고 대대로 칭송을 받았다는 황부자 이야기다.

한국 천주교 순교 사적지 절두산 성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한국 천주교 순교 사적지 절두산 성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마포대교 밑에는 역사적으로 아름답고 이름난 경치. ‘마포팔경’을 자랑하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명승지 마포를 상징하는 각종 홍보물들이 황금색이다. 이채롭다. 물도 마시고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야 한다. 조선시대 한강을 ‘경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경강에서 활동하며 부를 축적한 상인을 경강상인이라고 했다. 경강상인은 시전상인과 객주업, 선운업, 조선업, 장비업, 어부 등이라 한다. 마포는 쌀과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와 상점들로 유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절두산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 서있는 표지석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절두산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 서있는 표지석 모습(사진=김호선기자)

18세기까지 마포에는 '당주堂主, 색주色主, 객주客主' 등 "삼주三主"가 있었다고 한다. 마포는 조선팔도 전국의 물자가 모여들어 큰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뱃사공, 장사꾼들이 항상 북적이었다 한다. 또한 마포는 그 풍광이 아름다워 관리 및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 수많은 문학작품과 회화작품을 남긴 포구였다고 한다. 마포 황포돛배를 감상하고 또다시 걷는다.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 앞 마당에 조성된 형장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 앞 마당에 조성된 형장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마포대교 부근의 토정나들목이 있다. 조선 중기 학자 토정 이지함(1517~1578)과 관련이 있는 나들목이다. 토정은 마포 강변에 흙으로 언덕을 쌓고 아래에 굴을 파서 거처하고 위에는 정자를 지어 평생을 청빈하게 산 학자라 한다. 선생의 묘는 보령에 있다고 한다. 절두산성지를 가는 길에 밤섬을 바라보면서 현석나들목과 서강대교와 서강나루를 지난다. 서강나루는 서강대교가 놓이면서 기능을 잃었다고 한다. 마포나루에서 양화나루까지를 서강 혹은 서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강나루에는 세곡을 보관했던 곽흥창, 풍저창, 장창이 있었다.

절두산 순교 당시 형틀로 사용하였다는 밧줄이 묶어 있는 돌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절두산 순교 당시 형틀로 사용하였다는 밧줄이 묶어 있는 돌의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서울화력발전소(옛 당인리) 앞 쉼터에서 잠시 쉼을 갖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양화나루(대교)와 절두산성지를 향해 걷는다. 양화나루는 한강나루, 삼전도나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나루 중 하나였다고 한다. 양화라는 이름은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아 부르는 이름이라 한다. 당시에는 절두산을 누에머리와 같다 하여 잠두봉이라 했다고 한다. 수직 절벽(30m) 위에 있는 절두산순교성지(사적 제399호)에 도착이다.

양화대교 입구에 서있는 포은 '정몽주' 동상(사진=김호선기자)
양화대교 입구에 서있는 포은 '정몽주' 동상(사진=김호선기자)

조선시대 절두산은 풍류객이 즐겨 찾는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컫는 병인박해에 수많은 천주교인이 머리가 잘려 순교를 당한 곳이다. 그리하여 절두산이라 부르고 있다 한다. 병인년 10월 프랑스 ‘로즈’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침입하여다 한다. 흥선대원군은 화친을 허락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고 척화문을 세우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한다. 절두산 첫 순교자는 ‘이이송’프란치스코 일가족 등 30명이라 한다. 하지만 수천 명의 천주교인이라고 한다. 이는 먼저 참수 후 보고라는 선참후계의 영향이라 한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양화대교1,053m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걸어 다닐 수 있는 양화대교1,053m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절두산순교성지에서 바라본 한강의 풍광은 역시 아름답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다. 깊은 상처가 남아 씻을 수 없는 성지라니 발걸음이 무겁다. 곳곳을 둘러보지만, 가슴이 저미는 느낌을 받는다. 그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묵례하고 돌아선다. 먹먹하다. 형틀 바위에 묶여 있는 동아줄이 당시의 비극을 알려주는 듯하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묻혀있는 양화공원을 지나 포은 ‘정몽주’동상을 둘러 본 후 양화대교를 건넌다. 한강 하구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매섭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선유도공원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선유도공원에 조성되어 있는 아치형의 선유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선유도공원에 조성되어 있는 아치형의 선유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선유도는 본래 섬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선이 놀던 산이라 하여 본래 '선유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겸재 정선 선생의 화폭을 통해 보면 더욱 절경이다. 일제의 만행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선유도다. 1925년 일본은 선유봉을 폭파하여 그 토석으로 김포공항을 만들었다고 한다. 202년 4월 새롭게 조성된 선유동공원이라 한다. 정수장의 구조물들을 재활용한 공원은 파괴가 아닌 조화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선유도에서 두 성지를 답사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정리하고 쉼을 가지면서 선유교(469m)를 넘어 선유도역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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