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강경포구의 아름다운 순례길을 걷다

역사의 근대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강경의 강경성당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역사의 근대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강경의 강경성당 모습(사진=김호선기자)

노을이 명품이라는 옥녀봉(강경산 44m)’에 오르니 갈대가 흐느적거리는 아름다운 금강이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강물은 묵묵히 금강하구를 향해 흐르고 화려했던 읍내는 한산한 모습이다. 옥녀봉은 충청남도 논산에서 서남쪽 금강이 흐르는 강경읍에 있다. 강경읍은 근대화 거리가 보존되고 있는 화려한 포구의 기억이 있는 작은 읍이다. 이곳 강경에서 전라북도 익산 화산까지 금강을 따라 아름다운 순례길이 있다. 황금 들녘이 물결치는 그 길에서 소중한 역사의 흔적들을 찾는 발걸음이다

강경의 진산 옥녀봉에 있는 아름다운 풍광의 낙조 명소(사진=김호선기자)
강경의 진산 옥녀봉에 있는 아름다운 풍광의 낙조 명소(사진=김호선기자)

옥녀봉 풍경은 아름답다. 이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으며 커다란 보호수가 위엄있게 서 있다. 옥녀봉에 올라 서해로 저무는 노을을 바라다보면 한 폭의 수채화이며 추억의 포토존이라고 한다. 금강 줄기를 따라 조성된 황금 들녘 뒤로 계룡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강경에서 화산까지 답사할 일정을 정리해 본다. 30km의 거리 만만치 않은 일정이겠지만 궁금했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렌다.

옥녀봉 정상의 보호수와 봉수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옥녀봉 정상의 보호수와 봉수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강경은 소읍이지만 근대역사문화가 숨 쉬는 거리로 역사의 흔적들이 잘 보전된 고장이다. 옥녀봉 바위 자락에 해조대란 전망대가 있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해조문(解潮文 향토유적 제24)1860년에 제작된 암각문이라고 한다. 190자로 강경포구의 밀물과 썰물의 시간과 물 높이 등을 새긴 우리나라 최초의 조석표라 한다. 옥녀봉 아래에는 ㄱ자형의 초가집이 있다. 1897년에 폴링 선교사가 한국침례교회 첫 예배지라고 한다

금강이 바라보는 옥녀봉 바위에는 강경포구의 조수표 기록한 해조문(사진=김호선기자)
금강이 바라보는 옥녀봉 바위에는 강경포구의 조수표 기록한 해조문(사진=김호선기자)

봉수대 아래에는 소금집이 있다. 소금집은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의 배경이 된 집이다. 옛 아버지들의 초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장편소설 소금에서 주인공 선명우가 가출하여 살던 집으로 설정되었다고 한다. 소금집 담벼락에 이것저것 나누지 않고 하나로 합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야말로 강물의 일이 아니던가’. ‘늙어가는 아버지들이 돌아누울 때 굽은 등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적어 있다. 소금은 달고 시고 쓰고 짜다. 인생의 맛 또한 그런거지. , 사랑하는 당신도 달고 시고 쓰고 짜다. 여운이 남는 글이다

옥녀봉에 있는 박범신작가의 소금 주제의 소금집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옥녀봉에 있는 박범신작가의 소금 주제의 소금집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소금집에서 내려오니 시곗바늘이 멈추어 있는 듯한 골목이다. 색바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모습으로 근대화문화골목이라 한다. 구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장 관사가 있다. 지금은 옥녀봉 예술촌 골목으로 이용하고 있다. 폐가 된 옛 건물들을 살피면서 걷다 보니 강경성결교회가 나온다. 이 교회는 1924년 최초로 신사참배를 최초로 거부한 교회로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건너편에 경성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컸다는 구 연수당건재한약방’(2층 등록문화재 제10)이 눈길을 끌게 한다

금강변의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갈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금강변의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갈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연수당 앞 공터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흔적이 있다. 신부가 첫 사목활동을 하였다는 성지로 신부의 현양비가 세워져 있는 작은 공터다. 이곳은 원래 작은 초가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그 초가집은 남아 있지 않고 헌양비를 세워 성 김대선 안드레아 신부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 성지다. 신부는 이곳에서 약 2개월 동안 은거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강경은 젓갈의 고장으로 여기저기 100여 곳의 있는 붉은 젓갈가게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강경은 젓갈의 고장으로 여기저기 100여 곳의 있는 붉은 젓갈가게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신부의 헌양비를 뒤로 하고 빨간 종탑을 찾아 걷는다. 성 김대건 교육관이 있는 등록문화재 제650강경성당()’이다. 강경성당은 새하얀 건물에 종탑이 붉은색을 띠고 있다. 거룩하고 찬란하게 보인다. 깔끔한 잔디마당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이 더욱 돋보인다. 강경성당에는 라파엘호(길이13.5, 넓이4.8, 깊이 2.1m)’가 전시되고 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탄생촬영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최초 사목활동을 하였다는 성지(사진=김호선기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최초 사목활동을 하였다는 성지(사진=김호선기자)

기록에 의하면 라파엘호에는 11명이 승선했다고 한다. 운행 도중 폭풍우를 만나 모두의 안전을 위해 두 개의 돛대를 베어버리고 식량까지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폭풍우를 만나 일행은 이제 끝장이다. 살아날 수 없다. 절망하고 있었는데 겁내지 마라.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다. 기도하면서 안정을 되찾아 강경포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기록이다. 실감이 나지 않지만, 배에 올라 잠시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

강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대나무 숲에 있는 임리정과 죽림서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강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대나무 숲에 있는 임리정과 죽림서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강경성당을 살핀 후 강경 근대화 거리로 나선다. 강경은 발효 젓갈이 독보적이며 그 명성이 드높은 지역이다. 도로변에 있는 젓갈 상가 수가 100여개라 한다. 이색적이지만 젓갈 가게 색상과 간판들이 모두 빨갛다. 김장철은 물론 연일 관광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고장이다. 1911년 강경역은 호남선의 보통역으로 개통된 역이다. 강경은 금강포구를 이용한 번성한 도시였다고 한다. 강경젓갈은 우리나라 수요의 60%를 차지한다고 한다.

강경과 부여를 연결하는 금강의 황산대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강경과 부여를 연결하는 금강둔치공원 황산대교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강경은 조선 후기부터 해방 후까지 원산항과 더불어 2대 포구였으며,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 등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이었다고 한다. 옛 강경은 번창한 도시답게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등록문화재 제324), 구 강경노동조합(등록문화재 제323) 10여 점이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강경은 뱃길과 육로를 통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1920년 충청남도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도시라 한다. 1990년 금강하구둑이 준설되면서 뱃길이 막혔다. 강경역 앞에는 시간이 멈춘 듯 전통 근대화의 거리로 추억과 낭만의 도시다.

금강을 따라 익산으로 가는 길에 조망된 나바위성지가 있는 황금들녘의 화산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금강을 따라 익산으로 가는 길에 조망된 나바위성지가 있는 황금들녘의 화산 모습(사진=김호선기자)

강경 시내를 흐르는 대흥천 갑문을 지나 제방길로 간다. 금강변을 따라 화산까지 가기 위해서다. 매년 10월 하순에 열리는 강경젓갈축제가 열린다는 광장에 코스모스와 갈대가 아름답다. 여기에도 라파엘호가 전시되어 있다. 제방길에는 큰 배 모양의 강경젓갈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을 건너면 돌산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금강은 물론 강경읍내를 사방팔방으로 볼 수 있다. 강경에서 부여 세도면으로 가는 황산대교가 있다. 이 대교에서 군산 금강하구까지 33km. 13년 전 잔차를 이용하여 4대강을 돌던 때의 청춘이 그립다

아름답고 거룩하고 그윽한 화산 나바위에 조성된 나바위성당(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아름답고 거룩하고 그윽한 화산 나바위에 조성된 나바위성당(지)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전망대에서 대나무 숲에 있는 임리정죽림서원으로 간다. 강경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한다. 임리정은 조선 중기 사계 김장생이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임리정이라는 이름은 시경의 깊은 못가에서 서 있는 것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같이 처신을 신중하라는 의미라 한다. 정자에서 돌계단을 내려오면 인조 때 조광조, 송시열 등 주기학파들이 건립했다는 죽림서원과 팔괘정이 있다. 스승 김장생과 제자 송시열의 관계에서 오늘날 스승의 날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화산 나바위 정상에 있는 아름다움을 피정을 하였다는 망금정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화산 나바위 정상에 있는 아름다움을 피정을 하였다는 망금정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조선 현종 때 사액하였다는 죽림서원 앞은 금강 제방길이다. 옛 강경은 바닷사람과 산 사람이 모였던 곳으로 비린내가 진동하였으며 크고 작은 배들 100여 척이 정박한 포구였다고 한다. 금강을 따라 화산으로 간다. 화산은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 원래 일 일대는 바다였지만 일제강점기 때 간척하여 지금의 비닐하우스촌 모습이라고 한다. 시원한 강바람을 쐬며 황금 들녘에 솟아 있는 화산(40m) 나바위로 간다. 그곳에 나바위성당()이 있다

망금정에서 바라 본 화산 황금들녘의 아름다운 모습(사진=김호선기자)
망금정에서 바라 본 화산 황금들녘의 아름다운 모습(사진=김호선기자)

나바위성당(사적 제318)’은 화산의 언덕에 있다. 다른 성지의 성당과는 다른 느낌으로 산 전체가 성지이다. 나바위성당이 있는 화산은 우암 송시열이 철마다 다른 모습이 아름다워 화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바위란 말은 너른 바위를 의미한다. 나바위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가 귀국하면서 첫발을 내딛는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06년 베르모렐 신부가 유서 깊은 이곳에 세운 성당이라고 한다. 전통 한옥과 서양식 벽돌을 이용하여 건립한 독특한 형태의 성당이다.

화산 나바위성당 십자길에 있는 십자가 바위 모습(사진=김호선기자)
화산 나바위성당 십자길에 있는 십자가 바위 모습(사진=김호선기자)

나바위성당은 성지를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성지라 한다. 십자가 길을 따라 산 정상에 오르면 망금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1912년부터 망금정에서 금강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위해 피정하였다고 한다. 망금정 앞에 성 김대건 신부의 순교 기념탑(높이 4.5m)이 있다. 망금정 아래 바위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마애불이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며 합장한다. 화산 주변에는 김대건소나무, 수탉 바위, 십자가 바위 등 크고 작은 바위가 많다. 바위마다 그 의미와 뜻이 기록되어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화산에 최초 도착했다는 곳에 전시되고 있는 라파엘호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화산에 최초 도착했다는 곳에 전시되고 있는 라파엘호 모습(사진=김호선기자)

예전에는 화산 아래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다 한다. 신부가 화산에 도착했을 때 모습은 초라했다고 한다. 역사관에는 신부의 각종 기록이 전시되고 있다.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역사관이다. 화산 아래에 신부 일행이 최초 도착지라는 위치에 라파엘호가 전시되고 있다. 라파엘호는 상해를 출발한 지 4218451012일 밤 8시경 도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5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한 한 사람의 운명 앞에 고개를 숙이는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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