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무산 법무사무소 대표, 칭다오 영사의 생생한 현장 리포트 내놔

검찰 수사관과 해경, 중국 영사 생홭을 마치고 20여년 만에 서울 대림동에 법무사무소를 개소한 이강원 물무산 대표. (사진=한국뉴스)
검찰 수사관과 해경, 중국 영사 생홭을 마치고 20여년 만에 서울 대림동에 법무사무소를 개소한 이강원 물무산 대표. (사진=한국뉴스)

[한국뉴스 김종국 기자] 17년 검찰 수사관 생활을 정리하고 해경에서 맞은 세월호 참사, 혼란스러운 국면에서 인생을 바꾼 중국 영사 생활의 시작, 그리고 고향 뒷동산의 이름을 딴 '물무산' 법무사무소 개소, 이강원(53·사진) 대표의 지난 30여 년은 선 굵은 한 편의 영화를 닮아 있었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온 몸으로 치른 지금의 그는 오히려 편안하고 충만해 보인다.

최근 중국 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영사로 활동한 경험담을 담은 '특명, 재외국민을 보호하라'는 책을 출간한 이 대표를 한국뉴스에서 만나  차 한잔 나누며 그의 인생론을 들어봤다.

 

■ 17년 검찰 수사관 생활 마감, 거친 바다로 뛰어들다

이강원 대표는 인천지방검찰청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17년간 수사업무를 맡은 베테랑 수사관이다. 특히 형사사건에 전문성이 높다.

그는 “검찰청 일은 원래 정의로움을 갈망하는 저와 너무 잘 맞았다”고 운을 뗐다.

평소 사회현상의 부조리를 파악해 범죄를 추적하는 이 일이 자신의 ‘천직’이며 이 일이 결국 정의사회를 구현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고 그는 밝혔다.

그런 연유로 이 대표는 누구 보다 열심히 일했고 조직에서 인정도 받았다.

때로는 검찰에서 일한다며 목에 힘을 주고 권력기관의 '끝물'을 느낀 적도 있었다고 그는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하지만 사명감에 뒤에는 언제서부터인지 자책감이 밀려왔다.

이 대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저의 수사로 인해 괴로워하는 수감자 가족들을 지켜 보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며 “어느 순간부터 수사에 대한 관념이 변해가는 저를 발견했다”고 했다.

무엇보도 냉정해야 할 수사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커져가는 이 대표였다.

그러던 중, 2013년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 왔다고 한다.

당시 조직이 10년 전 보다 2배로 팽창한 해양경찰청이 검찰 수사관을 특별영입하고 있었다.

통상 검찰에서 경찰로 이직하는 경우는 드문 일인데, 이 대표는 ‘남에게 보이는 일 보다 보람 있는 일을 하자’는 평소 소신에 따라 국민적 사랑을 받던 해경으로 이직을 결정했다.

그는 “검찰에서의 한계를 딛고 21세기 블루오션으로 생각했던 해양 분야의 전문가가 되자는 간절한 소망으로 전직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검찰 수사관을 영입한다는 소식에 지원자 27명이 몰렸고, 그 중 2명이 합격했는데, 다행히 그의 이름도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그런데 해경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근무를 시작한지 3일만인 2014년 1월 31일, 여수에서 원유부두 해양 유류 오염 사고가 터졌다.
곧이어 해외에서 천연가스 등을 수입하는 모 공기업의 부실경영과 횡령 비리, 국고보조금 전용 사건도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수개월간 현장을 떠날 수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해경에 몸 담은 지 반 년이 되기도 전에 온 국민을 비탄에 잠기게 한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해경은 위상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전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해 5월 19일 해경 해체를 발표했다.

이 대표는 “수사 특채로 해경 식구가 된 저는 수사부서 해체로 동고동락했던 직원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며 “저의 생활도 쑥대밭이 됐다”고 말했다.

살아가야 할 길이 갑자기 막막해진 그는 해경 사무실 한쪽에 침낭을 깔고 잠을 청하며 ‘나는 어디에 서 있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고민으로 온밤을 하얗게 지새웠다고 한다.

해양경찰청에서 국민안전처 산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조직이 개편된 후, 이강원 대표는 3천 톤급 경비함정('3005함')의 행정관으로 부서를 옮겼다.

당시 중국어선들이 우리 해역을 침범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수십 척의 중국어선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상황을 생생하게 직접 지켜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제가 모르는 세계가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중국 어민들의 무허가 불법조업을 뿌리부터 근절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즈음 이 대표는 해양경찰청 고위 간부의 권유로 중국 상하이 총영사관 주재관에 응시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됐다.

문제는 중국어 실력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대표는 중국어 공부를 2011년 인천지검에서 근무할 때부터 시작했다.

중국 관련 범죄가 늘어나면서 중국 관련 수사를 하는데 있어 중국인과 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행정안전부에서 제공하는 인터넷을 활용해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며 “무슨 일이든 끝장을 보는 성격이 있어 중국어 한어수평고시인 신 HSK 4·5·6급을 차례로 땄다”로 했다.

이강원 물무산 법무사무소 대표가 검찰수사관 시절부터 중국어 공부에 매진해 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국뉴스)
이강원 물무산 법무사무소 대표가 검찰수사관 시절부터 중국어 공부에 매진해 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국뉴스)

그는 지적 호기심이 높아지면서 외국어대학교 20주 코스에 도전해 매주 월~금요일, 새벽 6시 반에 출근해 4시 반에 퇴근하면 주안역에서 서울 외대까지 왕복 4시간을 이동하며 중국어 공부를 했다.

'내친김에 학위도 따보자'는 생각으로 사이버외국어대 3학년에 편입해 중국어 학위를 받기도 했다.

2013년 3월 당시 이 대표는 인천지검 외사부에서 근무하면서 중국연구회를 창립하고, 창립세미나 사회를 중국어로 보면서 업무 전문성을 키우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게 중국어를 공부한 것이 이렇게 쓰임새가 있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며 “영사관에 서류를 접수하고 원어민과 면접시험을 1차로 진행해서 통과하고, 여러 교수들 앞에서 2차 심층 면접도 통과했다”고 말했다.

경찰청 '에이스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렸던 그는 2015년 2월부터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재외국민보호 담당 영사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 '손으로 발로 온몸으로' ...중국 영사 시절의 다짐 

이 대표는 영사 시절 중국 내 한국기업의 야반도주 사건을 비롯해 산동성 웨이하이 타오쟈쾅 터널에서 발생한 5·9 참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해줬다.

한국 기업 주재원 3명이 중국 근로자들로부터 숙소 출입을 봉쇄당한 일이 발생했는데, 수개월째 임금을 받지 못한 중국 촌민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숙소 출입문을 막고 한국 주재원의 출입을 막은 사건이었다.

이 대표는 “ 대부분 중국 공인(노동자)들은 한국 기업이 회사가 어려워지면 자신들을 방치하고 회사를 그대로 놔둔 채 도망간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저는 회사 관계자를 면담해 조속한 시일 내에 체불임금을 지불하고 회사를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분노한 수백 명의 공인을 달래 시위를 중단하도록 조치했다"고 했다.

하지만 시위대가 물러나자 한국인 직원들은 야밤에 짐을 싸서 도주하고 말았다.

이 대표는 "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중국 공인들에게 했던 말은 휴짓조각이 됐고,  대한민국의 국격은 훼손됐다"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 위중하고 엄중하다는 교훈을 깨달았다"고 했다.

또 2017년 5월 9일,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의 아침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타오쟈쾅 터널 내에서 11명의 소중한 어린 천사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간 참사가 발생했다"며 "조사 결과, 통학버스 운전기사에 의한 방화로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는데, 유가족분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날이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재외국민과 재중동포가 하나가 돼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아픔을 함께하고자 노력했다"며 "유가족 지원자, 분향소 지킴이, 장례 지원자 등 연 인원 2000여 명이 넘는 우리 이웃들의 자원봉사가 끝없이 이어졌다"고 했다.

5·9 참사 이후로 웨이하이지역 한인사회와 동포사회가 서로 돕고 단합하는 계기가 마련됐고, 총영사관도 대형사건·사고 대응에 있어서 대응 체제 구축 및 사고수습 절차를 면밀하게 파악하게 됨으로써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부 소속 해외 주재 공무원들의 일탈과 미흡한 자국민 보호 대책에 대해 이 대표는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동료였던 외교관들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참 어렵다"며 "영사관은 주재국의 법령을 준수하고, 법의 테두리 내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무리한 요청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국민들이 널리 이해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업무수행에 가장 중요한 태도는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려움에 처한 재외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돕는다는 태도로 근무에 임하고자 노력했고, '직접 몸으로 뛰자'는 마음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닥쳐도 잘 해결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강원 물무산 법무사무소 대표가 자신이 집필한 '특명, 재외국민을 보호하라'라는 제목의 중국 칭다오 영사 생활을 담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한국뉴스)
이강원 물무산 법무사무소 대표가 자신이 집필한 '특명, 재외국민을 보호하라'라는 제목의 중국 칭다오 영사 생활을 담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한국뉴스)

그렇게 이 대표는 주칭다오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4년간 수백건의 사건·사고를 전담해 처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 대표는 "'50세가 되면 소망하는 일을 하자'는 꿈이 있었고, 서울 대림동에 2019년 12월 13일 물무산 법무사무소를 차렸다"고 말했다.

'물무산'이라는 회사 이름은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에 있는 산의 이름을 땄다.

그는 "물무산을 오르 내리며 유년 시절을 보낸 추억이 있고, 중국에서 근무할 때 중국인 동포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만큼, 한국에 돌아와서는 여기에 살고 계신 그분들에게 도움을 줘야 겠다는 생각에서 대림동에 회사를 차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가끔은 돈이 없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듣다 보면 사정이 딱해서 서류를 다 작성해주고 그야말로 주머니에 있는 돈만 실비로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그들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강원 대표는 공직생활을 하는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외교관의 신념과 자세에 대해 끝으로 전했다.

그는 "주재국 인사들과 좋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건강한 ‘꽌시’를 유지하고 신뢰를 쌓아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 대표는 "책을 출간하면서 추천사를 써주신 제 10대 주칭다오대한민국총영사 이수존 총영사님의 추천사 내용을 일부 소개하고 싶다"며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즉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외교관이 해외 근무지에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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